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를 은폐 조작하여 당시 전두환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대학생들의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6년 6월 민주화운동항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건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말
1987년 1월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과 관련하여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을 조사하던 중 물고문을 가했고 물고문 도중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를 불렀으나 박종철은 이미 사망한 뒤였습니다. 경찰은 증거인멸을 위해 보호자와 이미 합의 했다고 말하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에 기사가 나가면서 경찰의 가혹행위가 제기되었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하며 공식 시인했습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결말
박종철의 부검 결과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고 중앙대 용산병원에서 달려간 의사 오 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증언으로 결국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 됐고, 공범이였던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이후 추가 구속,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 열기가 더욱 더 불타오르면서 주체할 수 없을만큼 폭발했습니다. 이후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곧바로 1989년 6월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제 5공화국의 몰락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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